▲ 서울 국방부 보통군사법원 (자료사진) ⓒ 연합뉴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박정훈 대령 항명죄 재판의 증언대에 앉은 증인들이 제일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방청석에선 탄식이 터진다. 모두 다른 내용은 잘 기억해 내다가 수사 외압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화, 통화 내용만 물어보면 유독 기억을 못하겠다는 반응이 나오는 게 우연의 일치라면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탄식이 터져 나오게 만든 이 대령의 대답
지난 3월 21일, 국방부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공판에는 해병대사령부 공보정훈실장 이아무개 대령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박정훈 대령의 선배로서 박 대령과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해 왔다. 증인신문 말미에 재판부가 이런 질문을 했다.
"(2023년) 8월 2일 오전 10시경에 해병대사령관과 문자메시지 여러 통 주고받고 전화도 했지요?"
8월 2일 오전 10시경은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이 박정훈 대령으로부터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한 8명을 혐의자로 적시한 수사기록을 정식 절차에 따라 경상북도경찰청에 이첩하는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직후다. 김 사령관은 9시 59분, 10시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참모인 공보정훈실장 이 대령에게 문자를 보냈고, 문자를 보낸 뒤엔 곧바로 전화를 걸어 3분 17초간 통화를 나눴다. 그 뒤인 10시 4분엔 이 대령이 김 사령관에게 문자를 보냈고, 뒤이어 10시 37분에도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8월 2일 오전 10시경에 김계환 사령관과 이 대령이 주고받은 문자와 통화 내용이 혹시 언론에 이첩 사실을 알리는 방안에 관한 것이 아닌지 질문했다. 이 대령이 공보 업무를 맡은 참모이니 재판부 입장에서 궁금해할 법한 일이다.
그런데 이 대령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답하자 재판부가 문자메시지가 휴대폰에 남아있을 테니 한 번 확인해보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공수처가 수사 중인 수사 외압 사건의 참고인으로 출석해 휴대폰을 포렌식 해서 확인이 어렵다는 식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재판부는 휴대폰을 돌려받지 않았냐며 포렌식을 한다고 문자메시지를 삭제하진 않을 테니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이 대령이 공수처가 포렌식을 했으니 그곳에 기록이 있을 것이고 지금은 확인이 어렵다며 난처해하자, 재판부는 문자메시지를 삭제했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 대령은 삭제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무슨 내용인지 진술하면 될 것 아니냐며 의아해하던 재판부에 이 대령은 확인을 요청하는 것이 문자메시지인지 카카오톡인지 되물었다. 재판부가 문자메시지라고 말하자 돌연 이 대령은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삭제해서 없다. 카카오톡은 남아있는데 문자메시지는 주기적으로 삭제한다."
역시 좌중에서 탄식이 터졌다. 방금 전까지는 삭제하지 않았다더니 이제는 삭제했다는 말이나, 언론과 공보를 담당하는 해병대사령관의 참모가 문자메시지를 주기적으로 삭제한다는 말이나 다 쉽게 이해되진 않는 말이다. 무엇보다 8월 2일 오전 10시에 김계환 사령관과 나눈 대화가 무엇이기에 이 대령이 이토록 당황해하며 재판부의 문자메시지 확인 요구에 응하지 못했는지도 의아하다.
진실의 퍼즐은 맞춰지고 있다
▲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이 지난해 10월 27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열린 종합감사에 출석해 있다. ⓒ 남소연
재판부가 8월 2일 오전 10시경의 상황을 궁금해했던 건, 해병대 수사단이 예정대로 수사기록을 경찰에 이첩한 사실을 알게 된 해병대사령관과 사령부 참모들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박 대령이 정말 '항명'하고 마음대로 이첩을 결정한 것이라면 이들의 대응 역시 급박하게 돌아갔어야 한다. 그런데 해병대사령관은 1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13분이 될 때까지 국방부 장관에게 이첩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북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이첩을 막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다른 부하들에게 이첩을 중단시키기 위한 명시적인 지시를 내린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다.
김계환 사령관은 그간 '이첩 보류' 명령을 반복적으로 발령했다며 박 대령이 자신의 명령을 위반한 중대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 8월 2일 오전 10시의 대응이 잘 조응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재판부는 이첩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김 사령관이 처음으로 연락을 나눈 상대인 공보실장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한 것이다.
김 사령관이 박 대령에게 명시적인 이첩 보류 명령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재판의 주요 쟁점 중 하나다. 때문에 상관인 김 사령관이 '명령을 어긴 부하'의 존재를 인식한 상황에서 보인 반응은 중요하다. 다만 공보실장인 이 대령이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고, 공판은 그대로 끝났다.
하지만 통화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김계환 사령관의 전화기가 바빠지기 시작한 건 8월 2일 오전 11시 13분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이첩 사실을 보고한 뒤부터다. 낮 12시 50분 임종득 전 국가안보실 2차장의 전화를 받은 뒤부터는 더 바빠진다. 대통령실, 국방부, 국방부검찰단, 해병대사령부, 경찰이 얽히고설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 개입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 절차에 따른 이첩행위를 '누군가'의 개입으로 막으려다 보니, 결국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박 대령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김계환 해병대사령관과 해병대사령관 비서실장, 해병대사령부 공보정훈실장 세 사람으로 박 대령을 기소한 군검찰 측이 신청한 증인들이다. 앞으로도 국방부와 해병대사령부의 주요 직위자들이 차례로 증인으로 불려나올 예정이고, 이후엔 박 대령 측에서 신청한 증인들도 나오게 될 것이다. 이들의 입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사실이 나오게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진실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작전 중에 발생한 해병대 고 채 상병 사망사고를 수사하다가 항명 등의 혐의로 군검찰에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중앙군사지역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참석하며 응원 나온 해병대 예비역들과 함께 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 유성호